《 제갈량에 대한 오해 》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비중을 가진 제갈량..
각종 도술에 그가 내세운 계책은 모두다 맞아 떨어져 모든 일들이 마치 부처님 손아귀에 놀듯이 몇수를 헤아려 보았던 그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1. 유비가 제갈량을 영입하기 위한 삼고초려의 오해
40대말의 별볼일 없었던 유비가 유표가 지배를 하고 있었던 형주에 쫓겨와 있을때 서서의 조언으로 형주 근방에 학문을 닦고 있던 20대에 불과한 제갈량을 삼고초려로 얻었다고 하는데,
유비가 삼고초려로 얻은 제갈량이 엄청난 실력이 있어서 유비가 2번 거절당하고 3번이나 찾아올 정도의 인물이었을까? 제갈량의 개인 능력치는 매우 뛰어 났을것이나,
제갈량의 능력치보다 주의깊게 보아야 할것이 그의 출신 가문이다. 제갈량의 장인은 형주 최고의 가문인 채씨 가문의 사위인 황승언이고, 그런 황승언의 사위가 바로 제갈량인것이다.
당시 시대상은 어떤 사람을 영입을 하면 그 사람의 인맥까지 같이 영입을 한다고 봐도 좋을것이다. 조조가 청류파의 거두인 순욱을 영입한 이유도 순욱의 능력치도 봤지만 그와 함께 하는 수많은 청류 호족들을 영입할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형주에서 지역 유지 사위였던 제갈량의 강력한 인맥으로 유비는 형주를 다스렸던 유장과도 쉽게 연결이 될수가 있었던것이고, 유장도 채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유비를 활용을 했던것이다.
2. 제갈량은 유비와 끈끈한 브로맨스를 가졌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제갈량과 유비의 관계를 서로의 안위를 걱정해주고 보살펴주는 주군과 충신의 관계로 묘사를 하고는 있었지만 앞서 삼고초려 사례에서도 봤듯이 제갈량과 유비의 첫만남은 유비가 심리적인 약자였고 제갈량은 심리적인 강자였었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한것은 사실이나, 관우나 장비와 같이 마음을 터놓는 사이는 분명 아니었다.
유비가 촉한의 황제가 되고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동오로 쳐들어가다가 이릉에서 대패를 한적이 있었는데, 이때 제갈량이 "만일 법정이 살아 있었더라면 이 전쟁을 막을수 있었을텐데.."라고 한탄을 하였다고 한다.
제갈량의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자신은 유비에게 동오 공격을 하지 말라고 막을수가 없었고, 법정은 유비에게 고언을 해줄 수 있는 친밀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정사에서도 유비와 법정이 대단히 끈끈한 브로맨스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를 제갈량이 중심이 된 형주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익주파의 리더격인 법정을 가까이 했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제갈량과 유비와의 관계는 패밀리 성격이라기 보다는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라 보는게 타당할 것이다.
3. 제갈량은 각종 전투에서 신출귀몰한 계책을 내놓았는가?
제갈량이 직접 군대를 지휘한 것은 유비가 죽고 유비의 아들인 유선이 황제로 즉위한 후 5차례에 걸친 북벌밖에는 없다.
유비 생전에는 제갈량이 전투를 할때 전략적인 면에 대해서는 조언을 해줄수는 있었지만 세세한 전술적인 내용까지 관여를 하지 않아 보인다. (기록이 없다.)
다만 제갈량은 유비가 전투를 하러갈때 본거지를 지킨다거나 병참을 운반하는 보급 역할을 했었을뿐이다.
유비 사후 5차례에 걸친 북벌은 제갈량이 직접 지휘를 하였는데, 이때도 번뜩이는 계책을 내놓았다기 보다는 군대를 조직적으로 움직이게 하였던 행정가의 모습이 제갈량의 본 모습이었을것이다.
4. 제갈량의 인품은 훌륭하였나?
물론 제갈량의 인품은 더 할나위 없이 훌륭하였으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사내 정치도 잘했고, 상대를 비방하기도 한 그였다.
예를 들면, 형주땅을 지키고 있었던 관우가 새로 영입한 마초의 실력이 궁금하여 제갈량에게 마초가 어떤 인물인지 물어봤을때 제갈량은 "마초가 장비님과는 대적할수는 있지만 미염공(美髥公)님에 비해서는 한참이나 그 무예가 낮습니다"라고 답을 해주었다.
여기서 미염공은 한황실의 헌제가 관우의 수염을 보고 아름답다하여 붙여준 별칭인데, 관우는 미염공이란 말을 무척이나 좋아하였고 제갈량을 살짝 눈엣가시로 여겼던 관우는 제갈량에게 그런 칭송을 들으니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고 한다.
제갈량도 자신을 시기하고 안좋게 보고 있던 관우에게 아부라는 사내정치를 함으로써 왠만하면 적을 만들지 않으려 하였다.
또한 앞서 말한 법정이 유비에게 사랑을 독차지 하다보니 형주파들이 법정을 시기하여 제갈량 보고 법정에게 본떼를 보여주어라라고 건의를 하지만 유비가 사랑하는 법정을 자신이 혼내주었다간 역풍에 휘말릴것 같아서 그냥 나두었다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5. 제갈량은 관대한 사람이었다?
삼국지 연의를 보면 제갈량은 매우 인정이 넘치는 사람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는 사람으로 알고는 있었으나 촉한 내부에서도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상당이 많았다.
특히 제갈량을 중심으로 하는 형주파가 익주로 입촉을 하고 권력을 잡으면서 터줏대감이었단 기존 익주세력들이 권력에서 소외가 되어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유비 임종때 제갈량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던 탁고대신인 익주파 이엄도 제갈량이 북벌을 할때 보급품 조달에 실패하여 실각하고 평민이 되고 홧병으로 죽게 되는데..
제갈량이 이엄 탄핵 상소문을 보면 이 사람이 관대한 제갈량인가 싶을 정도로 독설에 가득한 내용으로 이엄을 공격하는 글들을 많이 볼수가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것은 제갈량의 독설 가득한 탄핵문은 남아 있으나 이엄이 어떤식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대응하였는지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다.
더 이상한 것은 유비가 여포에게 서주자사직을 빼앗기고 예주목으로 강등되었을때 부터 함께 하였던 "진도"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진도"의 충성심과 용맹함은 "조운"과 비견된다고 하였고
유비가 동오와의 이릉전투에서 대패하고 백제성에서 후퇴하고 있을때 유비를 호위하는 근위병 대장이 진도였을정도의 핵심인물이었는데 유비가 진도 장군을 이엄에게 보내어서 제갈량 세력을 견제시키다가
이엄의 탄핵으로 같은 라인인 진도가 역사속에서 거의 자취를 찾아볼수 없을 정도의 미미한 인물로 전락을 한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승리자인 제갈량이 정적이었던 익주파의 리더인 이엄을 제거함과 동시에, 오랜 기간 유비를 따라다니며 충성하였던 진도 장군도 이엄과 같은 라인이었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역사속에서 지워버린 결과라고 본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제갈량은 관대한 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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