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에서 배울수 있는 몇가지 키워드 》
역사는 과학이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이벤트가 역사적 사실과 닮아 있다고 해서 그대로 진행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미래를 바라볼수 있는 통찰력을 얻을수는 있을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봉착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과거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바라보면 해결의 실마리도 얻을수가 있을지 않을까?
몇가지 키워드로 그 실마리를 찾아보도록 해보자.
1. 자기를 도와줄수 있는 사람을 확보
- 작은 사업이나 작은 정치를 할경우에는 보통 대표의 원맨쇼(자질)에 의존하는 경우가 커진다.
하지만 사업 규모가 커지고, 전국단위의 큰 정치를 하거나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대표가 아닌 조직의 힘이 탄탄해져야 한다.
조직의 힘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종업원이든, 파트너이든간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것에 공감을 해주고 협조를 해주거나 공동운명체로 참여를 해주는 사람이나 조직들이 많이 필요하다.
후삼국 시대때 초기의 패권은 후백제의 견훤이 쥐고 있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고려와 신라를 압박하고 있었으나 삼국을 통일한 것은 수많은 호족들과 결혼 동맹으로 자기편을 많이 만들었던 고려의 왕건이다.
견훤은 힘으로 상대를 짓눌렀지만 상대의 마음을 얻어 내편을 얻는데 주력을 하였던 왕건에게는 힘도 무용지물이었다. 심지어 후백제 영토였던 나주지방의 호족마저도 왕건에게 넘어간것을 보면 알수가 있다.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내편을 많이 만들자.
2. 사도세자 복권은 고종때나 가서나 되었다.
- 정조가 왕이 되면서 처음 내뱉었던 말은 "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이끈 자들을 모조리 숙청하겠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정조의 아버지가 사도세자임을 분명히 하고 자신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복권을 시켜달라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아들인 정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도세자는 끝내 복권이 되지 않고 한참후인 고종때에서나 가서 복권이 되었다.
사도세자의 복권이 바로 되지 않는 이유는 사도세자를 죽임으로 이끈 세력들이 건재하였고 이른바 생각의 관성으로 인하여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인식 자체가 전격적으로 변화하기가 어려운 분위기도 있었던것이다.
이러한 사도세자의 케이스가 박근혜 대통령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해줄수가 있다.
비록 나역시 탄핵이 잘못되었고, 박근혜 대통령을 복권을 시켜야 한다고 굳은 생각을 가지고는 있지만 정조역시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자신이 살아생전에 복권시키기가 어려운것처럼 한번 고착화 된것을 뒤집기는 매우 어렵다.
고착화된것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충분한 명분을 쌓아야 하고 강력한 힘을 얻어야 가능하다. 그것이 박근혜 복권에 있어서 어떤 스탠스를 가져야 할지 참고 하였으면 한다.
3.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시스템 중심으로 정치를 해야한다.
- 조선시대 건국공신인 훈구파는 건국초기에 자신들 가문 위주의 이너써클을 형성하며 정권을 잡았고, 훈구파의 권력에 맞서는 사림파들을 4번의 사화를 통해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였지만 선조 이후에는 훈구파는 사라지고 사림파만 남게 되었다.
훈구파에 의해서 정계에 진출한 수많은 사림파가 숙청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훈구파가 자취를 감추고 사림파가 생존할수 있었던것은 지방 서원에서 사림의 이념으로 무장한 선비들이 끊임없이 정계에 진출하였기 때문이다.
실력을 갖추지 못하고 특정 연줄에만 의존하였던 훈구파는 조선 초기의 커다란 위세에도 불구하고 조선중기에는 그 흔적을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4.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승자의 기록이다. 무조건 이겨야 좋은 사람으로 기억이 된다.
- 역사는 한자로 歷史라고 한다. 그런데 뒤에 "사"자의 모습을 보면 가운데中이 아닌 한쪽 방향으로 삐쳐 있으면서 표기가 되어 사(史)가 되었다.
다시 말해 역사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게 아니라 그것을 기록 하는 사람의 편견이 내포가 되어 있다라는 의미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인 이벤트 하나만 보더라도 보수의 생각과 진보의 생각이 크게 다르듯이 역사는 원래 중립적, 객관적으로 기술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발상이다.
기술하고 있는 사람은 결국 살아남은 강자이고, 그 강자가 보수냐? 진보냐? 혹은 청류세력이냐? 탁류세력이냐?에 따라서 바라보는 관점도 틀리고 어떤 사건을 넣을지? 혹은 삭제할지?도 달라지게 된다.
예를들면 백제의 마지막왕인 의자왕(義慈王)은 이름에서 내포하는 것처럼 의롭고 자비로운 왕이었으며 해동증자라고 칭할정도로 성군이었지만, 백제 의자왕에게는 삼천궁녀가 있었다라고 잘못 알려진것처럼 망국의 왕에게 나쁜 이미지를 덧씌워 다음 정권을 잡는 세력의 정당성을 부여를 해줄 필요가 있다.
( 실제 국력이 백제보다 수십~수백 컸던 조선의 경우도 궁녀의 수가 500명을 넘지 못했는데 무슨수로 백제의 궁녀가 3천명이나 되어서 의자왕이 먹여살릴수 있을지?? )
또한 후고구려의 궁예, 고려의 광종 그리고 조선의 태종은 사람을 엄청나게 죽이기로 유명한 왕이었다. 하지만 궁예는 망국의 패주이고 고려 건립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를 혼군으로 묘사하지 않을수가 없다.
이와는 반대로 고려의 광종과 조선의 태종 역시 사람을 많이 죽였으나 고려와 조선의 건국 초기에 왕권을 강하고 나라의 안정을 꽤하였기에 그들에게는 살인마라는 칭호를 부여하지 않게 된것이다.
이렇듯 같은 결과를 내어도 역사의 승리자는 성군이고, 역사의 패배자는 폭군이 되는 것이다. 역사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고자 한다면 정치적으로 반드시 이겨야 한다.
5. 원수라도 사랑하는 포용력을 가져야 한다.
- 고려의 현종은 왕氏 왕가의 친족끼리의 불륜으로 잉태된 출생부터 불우하였다. 게다가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사통을 하여 낳은 아이가 있었는데 목종에 아들이 없기 때문에 당시 대량원군(후의 현종)이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음을 경계하여 천추태후는 끊임없이 대량원군을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강조 정변후에 목종과 천추태후가 실각후 가까스로 현종이 왕으로 즉위를 하였으나 때마침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여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길을 가게 되었다.
현종에게는 그를 지지하고 보호해주는 호족세력이 없었기에 그를 반겨줄 지방 토후 세력들이 없었고 급기야 현종을 죽이려고 하는 모습도 숱하게 연출이 된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등의 신들린 활약 덕분으로 거란은 고려땅을 물러나게 되었고 남쪽에 피신한 현종은 개경으로 돌아올수가 있었다.
가까스로 왕권을 회복하고 안정을 도모한 현종은 피난길에 자신을 핍박하고 죽음의 위기까지 몰고갈 지방토후들에게 아무런 벌을 내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끌어안아버렸다.
개인적인 원한은 뒤로 하고 국가의 통합을 우선시 한 큰인물다운 모습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통합으로 말미암아 전쟁으로 상처받은 고려 내부는 빠르게 아물게 되었고 고려는 다시 한번 중흥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현종의 현(顯)은 업적이 나라 안팍으로 널리 알려졌다란 의미를 내포하였다.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합하고 아우르는데 힘을 쏟았기에 이러한 묘호를 받지 않았나 싶다.
(참고로 현종 이후에 현종의 자식들이 왕위를 쭉 이어 받는다. 가히 제2의 고련 건국이라 할만한 중흥 군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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