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아이비 역사

나혜석 이야기

아이비리 2020. 10. 6.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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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 이야기 》

직장생활 할때 수원 인계동에 있는 나혜석 거리 근처에 있는 고기집과 술집주변에서 회식을 많이 하였었다.

빽빽한 술집과 고기집 사이에 비교적 넓디넓은 면적의 공터 같은 곳에 나혜석 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회식하고 술 마시기 바빠서 한복 복장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나혜석이란 분이 누군지 관심도 없었고 알길이 없었다.

게다가 나혜석이 사람이름인지? 인계동 공터에 있는 나혜석 상이 나혜석인지? 왜 비싼땅에 상업 시설을 더 만들수 있는것을 희생하고 이런 공터에 한복을 입은 여자상을 만들었는지 관심조차 없었고 그저 나에게는 술에 취해 가끔씩 보이는 석상일뿐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우연찮게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혜석이 사람이름이라는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도 수원 출신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런데 충격적인게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 중심의 문화속에서 그 모든것을 거부하고 주체적인 여성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는점이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조용한 여성인권운동가라고 표현하면 적당할까? 그는 무슨 페미 단체같은것을 만들어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기존에 고착되는 질서에 저항을 하였다.

나혜석은 오빠인 나경석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가게되어 미술 공부를 하게 되었고, 전도 유망한 김우영이란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자신을 평생 사랑할것, 그림 그리는것을 방해말것, 첫사랑의 대상이었던 사람의 묘지에 비석을 세울것, 시어머니와 김우영의 전처에서 난 딸과 같이 안살것을 결혼조건으로 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혜석과 김우영은 1927년에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싶어 세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나혜석의 훗날 스토리는 다음에 언급하기로 하고 일제 시대때 조선인은 수탈당했다고 알고 있는데 노예처럼 수탈받는 조선인이 어떻게 일본까지 날라가 미술공부를 할수가 있고, 어떻게 본인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수가 있고, 어떻게 세계 여행까지 갈수가 있으며, 어떻게 이혼까지 할수가 있고, 어떻게 당당한 인격체로 살아갈수 있는지 현재의 역사교육 프레임에 넣어 생각해보면 억지스러운게 너무나 많다.

가끔 사업상의 일로 일제시대때 발간된 자료들도 간혹 참조를 하는데 조선인들과의 수많은 계약서를 볼수가 있고 조선인 농부들에게 월급을 따박따박 주고 있다는 명세서도 볼수가 있는데 이들을 수탈 했으면 무슨넘의 계약서가 필요하며, 월급까지 주었다는 증빙이 필요하는지 알길이 없다.

물론 21세기의 대한민국 정부도 대통령 비방했다고 잡아가는 현실에서 36년간의 일제시대때 일본정부라고 조그마한 잘못이 없진 않았을것이다. 역사적 해석을 할때는 관점에 따라 다른 해석이 있을수는 있겠지만 자그마한 사실을 가지고 전부인양 해석하는것도 문제이고, 자신의 관점과 맞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의견과 배척되는 상황을 애써 외면하는것도 문제이다.

얼마전 네이버에 천재학습백과 초등사회용어 사전에 "수탈"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일본이 조선을 수탈 대상으로 삼았다고 하기에, "수탈했는데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평균수명이 조선보다 높은 이유는 뭡니까? "하고 문의를 하니 답변을 거부하겠다라는 통지가 왔다. 조선인 나혜석도 자기의 의지로 일본 유학가고, 자신의 의지로 세계 여행가는데 수탈의 대상이라면 가능했을까?

무작정 일본을 옹호하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는 정확한 팩트와 사실에 대한 제대로 된 정의를 했을때에만 인사이트가 생기는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동당하고 분노만 하고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수가 없다.

#아이비역사 #나혜석 #여류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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