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정님 글을 옮겨왔습니다.)
이승만의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문을 다시 읽어 보았다.
이 연설문을 읽으면 여러가지 이유로 놀라게 된다. 첫째, 이승만의 영어가 너무 탁월하다. 이승만은 30살 늦은 나이에 유학을 갔기 때문에 발음과 억양이 그렇게 좋은 건 아니다. 또 이승만의 육성 연설은 대부분 그가 고령일 때 녹음 된 파일들이다. 따라서 이승만의 육성 연설을 들으면 그의 영어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이승만 영어의 진가를 맛보려면 그가 쓴 글을 읽어봐야 한다. 이승만은 어휘 사용과 문장 구조, 그리고 격식에 맞는 표현과 행간의 의미까지, 미국 최고 엘리트들이 사용하는 영어를 사용 했다. 놀랍다. 영어를 나름대로 한다는 사람들이 발애 채일 정도로 많은 요즘 같은 때에도 이승만 같은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나는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이승만의 미합동의회 연설문을 읽으면서 놀랐던 두 번째 이유는, 이승만이 너무도 당당하게(마치 미국의 대통령인 것처럼) 연설을 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신생국 대한민국은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잿더미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아시아 신생국의 지도자는 세계 최강대국의 정치인들을 앞에 앉혀 놓고 이런저런 훈수를 두며 가르침을 선사한다. 한미관계가 만신창이가 되어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조롱거리를 면하지 못하는 대통령을 둔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국격의 의미가 한층 더 무겁게 다가온다. 체감 상으로는 지금에 비해 오히려 이승만 시절 대한민국의 국격이 더 높았던 것 같다. 사자가 이끄는 양무리가 양이 이끄는 사자무리보다 강하다. 지도자는 그래서 중요하다.
이 연설의 후반부에서 이승만은 중국의 잠재적 위협에 대해 경고하며 미국이 평화무드의 안락함에 취해 중국 문제를 당장 해결하지 않는다면 훗날 크나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을 경고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소름이 돋았다. 이승만은 마치 미래로부터 온 사람처럼 중국의 위협을 내다보고 있었다. 중공은 250만이라는 병력을 가지고 있으나 실상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며 중국의 경제상황이 취약 하기에 지금 손을 봐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승만은 중국 본토가 자유 진영으로 환원 된다면 미국은 한국 및 인도차이나에서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세력 균형이 소련에게 불리하게 기울어 져서 소련은 감히 미국과의 전쟁 모험을 시도하지 못할 것이라고 역설 한다.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이 당시 이승만의 조언을 따랐다면 지금 겪고 있는 미중관계 진통의 상당수를 덜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 연설문을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연설의 도입부였다. 도입부에서 이승만은 자신도 미국적 민주주의와 전통을 반세기 이상 신봉해 왔다고 밝힌다. 또 많은 미국인들과 같이 자신도 워싱턴, 제퍼슨, 그리고 링컨으로부터 큰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자유와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운 미국의 선조들처럼 자신도 평생 자유를 수호하고 보존하려고 맹세 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이승만이 스스로를 "미국인(American)"이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I am Korean but by sentiment and education, I am American (나는 한국인이지만 정서와 교육을 놓고 본다면 미국인이기도 합니다)"이라고 말했다. 이건 연설문 원고에 준비 된 내용이 아니라 이승만이 즉흥으로 했던 발언이었다. 혹시 모를 논란의 여지를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출판 된 <이승만의 방미일기>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다.
이승만은 열렬한 애국자였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이승만이 자신을 '미국인'이라고 말했던 것일까? 미국과 마찬가지로 공화국으로 건국 된 대한민국의 지도자로서, 자신도 미국이 추구하는 자유와 독립의 정신을 가슴 깊이 공유한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 그런 표현을 썼던 것 같다는 추측을 해본다. 나는 이승만이 자신을 '미국인'이라고 언급한 연설을 읽으며 케네디의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Ich bin ein Berliner)" 연설이 떠올랐다. 그 연설문에서 케네디는 과거 2천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이 "나는 로마시민입니다"였던 것처럼 오늘날 자유 진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며 서베를린 시민들과 자유진영 국가 사람들을 격려한다. 이승만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미국인입니다"라는 부분을 즉흥 연설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개혁의 방향을 이야기할 때 미국식 방법과 제도를 말하길 좋아한다. 내가 그런 접근을 취하는 건 미국의 것이 무조건 옳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제시하는 가치와 규범이 옳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방법론을 찾다 보니, 그 가치가 이미 미국에 의해 오래 전 제시 되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그 결과 미국적 가치를 따라가게 된 것이다. 물론 미국으로부터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본받지 않아야 할 것도 존재한다. 그런 분은 가려내어 취사 선택하면 될 일이다. 나는 이승만이 자신을 미국인이라고 했던 말의 뜻을 이해한다. 자유와 독립에 대한 사랑과 미국 건국정신에 대한 존경을 이승만은 '미국인'이라는 단어 속에 압축해서 표현해냈다. 케네디가 연설을 통해 더 많은 '베를린 사람'들이 생겨났으면 하는 기대를 표출했던 것처럼, 한국에도 이승만이 언급한 맥락의 '미국인'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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