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회장의 추억 》
제목을 저런식으로 달아두면 마치 내가 이건희 회장을 잘 아는것 같지만 십수년간 회사에 있으면서 이건희 회장을 직접 본일은 없다.
다만 그분의 아드님인 JY 형님은 울 회사 방문 하실때 한번보고, 서초동 사옥에서 우연찮게 한번보고, 각 계열사별 경쟁사 벤치마킹 전시회인가?에서 한번 보았을뿐이다. 아.. 이건희 회장님의 사위분과는 술자리도 두차례 가져보았구나.
고 이건희 회장의 아버지 되는 고 이병철 회장은 "사업보국"이란 신념으로 사업을 하여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애국심에 기반한 경영을 하셨다면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란 기업자체를 글로벌 넘버 원이 되게 하기 위한 신념으로 경영을 하셨다.
(※ 반도체 사업은 이건희 회장이 시작했다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병철회장의 동경 구상에서 시작이 되었고,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4백년간 영국을 먹여 살린것처럼 이병철 회장 당신도 반도체로 대한민국을 4백년 먹고 살게 하겠다는 원대한 비전이 있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 회장이 되면서 국내 1위에 안주했다간 회사가 절단이 나겠다는 위기감에 항상 잠을 이루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 SBC 방송(삼성 사내방송)에서 세탁기 조립하는 공정에서 금형치수가 살짝 안맞아 조립이 잘 안되어 플라스틱 사출물들을 구슬땀 흘려가며 열심히 깍고 있는 종업원들의 모습을 보시고 크게 대노하여 계열사의 모든 임원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불러 며칠동안 날밤 새워가며 처자식 빼놓고 다 바꾸자라는 그 유명한 말을 하게 된다.
프랑크푸르트에서의 그 일성으로 인하여 삼성은 제2의 창업을 선포하고 양 위주에서 질 위주로 경영의 방침이 바뀌었고 그 결과 경북 구미 인동에 있는 삼성전자 애니콜 공장에서 그 유명한 애니콜 화형식이 벌어진다.
불량을 만들어서도 유출해서도 안된다는 일종의 퍼포먼스로 약 15만대의 휴대폰이 잿더미가 되었는데 이때 공장에서 근무하던 종업원들의 분위기는 숙연해졌고 나이 어린 여사원들은 꺼이 꺼이 하며 울기까지 하게되었다고 한다.
이런 기합이 들어가니..전부문의 계열사에 질위주의 경영이란 DNA가 널리 퍼지게 되었고 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이 경영을 하는 동안 수백배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세금의 무려 10퍼를 담당하고 시총의 20퍼센트 가량 차지하는 대한민국 경제를 떠받치는 중춧돌이 되었다.
이건희 회장은 앞에서 잘 나서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어록은 정말 많아 책자로 만들어 수많은 삼성인들에게 경영의 교과서처럼 남겨 그룹회장에서 부터 말단 직원까지 하나되는 삼성인 싱글 삼성을 주창하셨다.
수십년 경영을 하시면서 잘한점만 있었을까? 물론 그가 한 행동이 모두가 올바르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현재의 개판같은 정치상황에서 적어도 이해가 되는 일들은 많다. 얼마나 외풍이 심해 흔드는 조직이나 사람들이 많았을까..
한 시대를 풍미한 거인은 이제 가셨다.
앞으로의 일들은 이건희 회장이 남기신 정신적 자산을 물려받은 수많은 기업가가 해야할 몫일것이다.
나를 포함한 누군가가 이건희 회장을 뛰어넘는 거인이 되길 기원하면서.. 아디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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