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양지인(宋襄之仁)의 고사에서 얻을수 있는 교훈 》
춘추전국 시대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합쳐 부른말로, 이 시기는 "주"라는 황실의 권위가 크게 떨어져 중국 전체의 질서를 주 황실을 대신한 제후국중 가장 힘이 강한 제후국인 일명 "패자"가 이끌어 가는 구조였다.
다시 말해 여러나라가 있지만 미국과 같은 경찰국가 같은 동시대를 사는 모든 나라들을 통제함을 의미하는데 패자가 되려면 여러 제후국들을 자신의 나라로 초빙을 하여 회맹을 열어야 하였는데 그런 기준에 맞는 최초의 패자는 강태공의 후손국인 제나라의 환공이었다.
제나라의 환공은 관포지교의 고사로 잘 알려진 관중을 재상으로 임명하였고 관중은 사람들에게 세금을 감면하고 상업활동을 왕성하게 하여 부국을 달성하였고 그런 연후에 강병을 이뤄 환공을 첫번째 패자로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명재상인 관중이 죽고 제환공은 늙어 총기가 사라져 간신배가 친 인의 장막속에 살다가 황당하게도 굶어죽게 되었고, 그의 시체는 부패가 되어 구더기가 필 정도까지 사후처리를 하지 않았다.
한때 춘추시대의 초반기를 호령하였던 패자의 결말치고는 상당히 비참하였다.
당연히 제나라 가지고 있었던 "패자"위치는 사라지게 되었고, 관중과 환공의 사후의 제나라는 서서히 그 힘을 잃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권력의 공백기에 두번째 패자가 된 오늘의 주인공인 송양공!!
춘추시대때의 송나라는 저 옛날 주무왕과 강태공이 상(은)을 멸한후 상(은)나라의 후손들이 제사라도 지내며 살도록 배려한 제후국이 바로 송나라이다.
먼옛날이긴 하지만 한때 나라를 경영하였던 왕족 출신의 제후국이라 그런지 상당히 자존심도 강하였고 체면을 중시하였던 분위기 였다.
당시 제후국들 중에 남쪽에 위치한 초나라가 있었는데, 초나라는 엄밀히 말을 하자면 제후국이라 부를수 없고 춘추시대의 이단아이자 오랑캐로 취급되던 그런 나라였다.
제후국이라고 하면 주나라에게 영토를 하사받은 제후이어야만 하는데 초나라는 그러하지 못하였고 남쪽에 있던 특성상 나라는 어찌 어찌 성립이 되어 있으나 문물등이 제대로 전파가 되지 못하여 기존 제후국들에게는 천대와 멸시를 받던 나라였다. 또한 다른 제후국들의 최고 수장을 공(公)이라고 불렀지만 초나라는 불경하게도 왕(王)이라 부릴정도로 기존 제후국들과는 확실히 이질감이 있었다.
아무튼 당시 춘추시대때는 제후국들이 반 초나라 연대를 하거나 초나라를 은근히 왕따를 하였었는데 제환공이 죽고 제나라의 패자 자리가 사라지자 송의 양공이 패자를 하고자 본인이 회맹을 주도하게 된다.
사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송양공을 패자로 두느냐 마느냐 가지고 설왕설래가 많지만, 어쨌든 고귀한 제후들을 송나라에 불러모아 회맹을 주도한것만 봐도 송양공이 패자라 불리워도 틀린말은 아닐것 같다.
앞서 말한것 처럼 전체 제후국들은 초나라를 오랑캐로 인식을 하였고, 오랑캐라 인식을 하였던 초나라의 세력이 점점 커지니 불안해질수 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송양공은 오랑캐인 초나라를 혼내줌으로써 패자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였고 초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그렇게 하여 "홍수"라는 강가에 송과 초가 대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초의 군대가 늦게 도착하자 송양공의 참모인 목이가 초나라의 진영이 갖춰지기 전에 공격을 하자고 제안을 하였지만 송양공은 인의의 군대는 그런 비겁한 행동을 하면 안된다라고 거절하였다. 안그래도 송양공은 자신의 전차에 "인의(仁義)"라는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깃발을 꽂고 참전하였다.
그렇게 공격 기회를 놓치다가 초가 홍수를 건너오기 시작하자 목이가 지금 공격하면 이길수 있다라고 하였지만 이번에도 송양공은 인의를 내세워 공격하지 않았다. 초가 홍수를 건너 방어를 하기 위한 목책을 세우고 있는데 목이가 지금이라도 공격하면 이긴다라고 하였지만 송양공은 정정당당하게 싸워야 하고 목이를 꾸짖었다.
초나라의 진영이 세워지자 그제서야 공격명령을 내린 송양공은 병사들에게 "적을 공격하되 다친 적의 병사는 죽이지 말고 늙은 노인들은 아예 공격조차 하지 말라"라는 공격을 한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짐작한대로 송나라의 대 참패였고, 홍수 강가에서 송양공은 화살을 막고 세상을 뜨게 되었다.
아마도 당시 춘추시대에는 전쟁이 일종의 스포츠 경기같은 페어플레이나 나름의 신사도 같은 낭만도 있었고 문명국이 야만국에게 한수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자신감도 있었을런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을 너무 높게 보고 상대를 깔보며 전쟁이란 본질은 생각 안한채 안일하게 대처를 하다보니 자신의 목숨을 몰론이거니와 국가의 존망도 위태롭게 만들어졌다. (예상한대로 송나라는 이후로 국력이 쇠퇴하여 전국시대는때는 나라가 갈기 갈기 찢어진다.)
후대의 사람들은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고 일컬으며 송양공의 어리석음을 뒤돌려 까고 있는데,
송양지인의 고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것은 쓸데없이 남에겐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하여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특히 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급박한 순간에서는 송양지인이란 고사를 다시 한번 돌아봤으면 좋겠다.
최근 네가 틀리고 내가 맞다라는 식의 갑론을박이 진행되고 있는데, 너무 우리 진영에게 엄격하게 대하는 것이 아닌가 되돌아 보았으면 한다.
#아이비역사 #송양지인 #춘추시대 #송나라 #송양공 #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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